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 독립운동 (문단 편집) === 1930년대 ~ 광복 직전 ===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국제반제동맹이 창립된 이후 반제동맹이라는 [[반제국주의]] 운동 단체가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에서 반제동맹은 1930-193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반제동맹이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같은 국내 대중운동의 폭발과 일본의 만주침략에 따른 반전투쟁의 긴급한 시대적 요구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반제동맹은 주로 학생층을 중심으로 조직됐다. 비밀 독서회를 만들어 활동가를 양성해 학교 단위로 반제동맹을 만든다. 학교 단위를 기초로 지역 단위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반제동맹 조선지부 학생부'를 완성하려고 했다. 학생 반제동맹은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조합 활동가를 양성하는 훈련장이기도 했다.[* 출처: 박한용, 일제강점기 조선 반제동맹 연구]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경성반제동맹)의 경우 [[이관술]], 이순근, 조정래가 활동했다. 이외에 경성제대반제동맹(성대반제동맹)등 여러 반제동맹과 독서회가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반제동맹활동개요.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반제동맹조직책동.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반제송국.jpg|width=100%]]}}}|| ||<-3>'''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를 보도한 기사 중 일부. 경성반제동맹은 대대적으로 대서특필된다. 최고 학부를 졸업한 엘리트가 참여했다는 점이 큰 관심을 끌었다.''' || 일제의 탄압이 가중됨에 따라 국내의 사회 운동은 비합법적인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이 주도하기 시작했으며, 정치적 투쟁 또한 격화됐다. 대표적 노동운동가인 [[이재유]]는 코민테른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를 거부하며 국제주의와 국내주의를 균형있게 추구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공산주의를 적절히 독립운동에 활용했다. 이재유가 체포되자 [[이관술]]의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hn&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position=1&levelId=hn_026_0050_006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지도하에]] [[경성 트로이카]] 활동가들이 재결집해 [[경성 콤그룹]]을 결성하여 노동운동과 국내파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식민지 조선 남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꽃[* 실제로 김경일 교수가 경성트로이카에 꽃이라는 표현을 쓴다.]이 [[경성트로이카]]-[[경성콤그룹]]이라면 식민지 조선 북부에는 [[이주하(1905)|이주하]]가 지도하는 원산 공산주의자 그룹이 있었다. >원산그룹사건은 혜산사건[* 혜산사건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사건이다. 나중에 북한 갑산파가 되는 세력과 관계있다고 한다. 일제 경찰은 갑산파보다 이주하 그룹을 훨씬 높게 평가하는 게 흥미로운 부분.]과 달리 코민테른·중국공산당·일본공산당 등과 전연 연락 없이 완전히 사상적 전과자에 의한 일군의 적색노동조합 조직운동을 기초로 했으며, 아래로부터 시작된 점에서 현저한 특색이 있다. 테러 행위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수뇌부의 높은 사회주의 의식 수준, 인민전선전술의 정확한 파악, 그 운동 전개의 교묘한 점, 특히 대중 획득을 위한 적극적인 문서 활동의 전개 등은 혜산사건에 비할 바 아니고, 그 대상이 국경 산악지대의 의식수준이 낮은 농민과 원산 같은 수준 높은 노동자와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현저히 운동이 첨예화되고 있는 것으로 이 점 주목된다. 만약에 원산의 이 운동이 1, 2년 더 지속되었더라면 원산철도 2천 수백여 명의 종업원은 물론이고 원산의 노동자 대부분을 조직원으로 포섭하여 어느 때고 무장봉기에 동원할 준비가 완료되었을 것이다. >---- >원산그룹에 대한 일제 경찰의 기록 [[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8900|[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38회] 역사에서 사라진 원산그룹]] 일제는 이 시기 민족말살통치를 실시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민족 문화 보존의 중요성을 깨닫고 민족문화수호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선어학회]]가 1931년 창립되어 우리말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언론사들도 조선어 교육에 힘쓰기 시작했다. 역사학자들 또한 [[한국사]] 연구를 통해 민족 문화를 수호하려 했다. 또한 예술과 문학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자세한 건 아래의 민족 문화 수호 운동 부분 참조. 1931년에는 [[김구]]가 [[한인 애국단]]을 창설했다. 이에 1932년 한인 애국단원인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쇼와 덴노]]를 저격하였다가 실패했다. [[윤봉길]] 의사도 같은 해에 훙커우 공원 의거를 성공시켰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하여 [[국민대표회의]] 이후 위축되었던 임시정부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국외에서는 무장투쟁 또한 활발히 전개됐다. 이 시기의 국외 무장투쟁은 주로 [[만주]]와 [[중국]] 관내에서 이루어졌다. [[만주]]에서는 1931년 발생한 [[만주사변]]으로 [[한국]]과 [[중국]]이 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남만주 지역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이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와 흥경성 전투에서 이겼다. 양세봉은 이후 일제에 의해 매수된 [[중국인]]에 의해 죽게된다. 북만주 지역에서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대전자령 전투, 사도하자 전투 등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겼다. 지청천과 한국독립군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1930년대 후반에는 [[간도]] 지역에서 조국 광복회가 [[중국]]의 항일부대와 연합하여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고 [[보천보 전투]]에서 이겼다. [[중국]] 관내에서는 보다 복잡하게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1935년 [[난징]]에서 [[김원봉]]이 [[좌익]]과 [[우익]]의 5개 단체를 연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다. 하지만 [[김원봉]]의 독주로 [[조소앙]]과 [[지청천]] 등의 [[우익]] 인사들이 이탈했다.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만주]]에 존재하던 한국독립당과는 다른 조직이다.]과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은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한 후 [[김구]]가 1935년에 조직한 한국국민당과 연합하여 1937년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곧 [[한국독립당]]으로 개편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 역할을 하게 됐다. [[임시정부]]는 1940년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한편 [[김원봉]]은 다시 좌익 세력을 규합하여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고, 1938년 산하 군대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이후 1941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결성되고, [[중국]] [[팔로군]]과 연합하여 호가장 전투에서 승리한다. [[김원봉]]은 이때 조선의용대 일부를 이끌고 [[한국광복군]]에 합류했고, 잔여 세력은 [[김두봉]]의 주도 하에 1942년 화북의 사회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산하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군을 두었다. 1940년대에는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됨에 따라 [[독립운동가]]들의 건국 준비 활동도 활발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조소앙]]의 [[삼균주의]](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를 토대로 건국강령을 공표했다. 국내에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익 [[독립운동가]]들이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광복을 준비했다. 한편 경성콤그룹은 1941년의 대규모 검거와 [[박헌영]]과의 연락 두절에도 불구하고 경성콤그룹 조직원들은 조직선을 유지할 수 있었고 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조선건국동맹]]과 연계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며 광복 순간까지 항거를 계속했다.[[https://search.i815.or.kr/data2/ebook/history/056/index.html|#]] 경성콤그룹의 첫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박헌영 영입 후 최고지도자 자리를 넘겼었으나 결국 끝까지 경성콤그룹을 이끈 지도자는 이관술이었다.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 >[[김태준(1905)|김태준]], 연안행 >1944년 말~1945년 초에 이르러 [[조선건국동맹]]·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경성콤그룹]]''' 세력 등이 무장투쟁을 위해 비밀연락·연대를 활발히 벌였다. >---- >[[https://search.i815.or.kr/data2/ebook/history/056/index.html|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 >해방직후 한국에서는 일대 혁명적 고양이 일어났으며, 그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8·15후 분출하는 대중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조직적 역량이 일제 말기에 어떻게 준비됐는지를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일제 말기의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다.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은 중일전쟁 발발 후 점차 감소 경향을 띠며 1940년에 그 최저 상태를 기록했으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부터 양상이 역전되어, 그 증가 추세는 일제의 패망 시기까지도 계속된다고 한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은 서울지방에서만도 경성콤그룹을 비롯하여 공산주의자협의회, 스딸린단, 화요회그룹, ‘자유와 독립’ 그룹 등과 같은 비밀 단체를 결성해서 활동했다. 경성콤그룹은 1936년 12월에 검거된 이재유그룹의 잔존 성원들이 이관술의 지도하에 재결집되어 활동하다가 박헌영을 조직의 지도자로 맞아들여 결성된 것이었다. 이 단체는 기존의 각파 사회주의자를 망라하여 구성된 것으로서 서울지역의 노동자·학생층은 물론 함경도를 포함한 지방에까지 자신의 조직활동을 확장했다. 이 단체는 1940~41년에 몇 차례의 검거사건으로 약화되긴 했으나 해방직전까지 줄곧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참가한 비밀단체 가운데에는 건국동맹과 같은 통일전선 단체도 있었다. >---- >韓國史硏究의 回顧와 展望[[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hn&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position=1&levelId=hn_026_0050_006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